소통이 아닌 고독을 선택한 왕의 눈물 !! 지난 이야기



용의 눈물, 정도전, 뿌리 깊은 나무

드라마 ‘용의 눈물’은 이방원의 일기라 표현해도 지나친 묘사는 아닐 것이다.
  
159편의 역사 대하드라마를, 전력 질주를 해서 살펴보며,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드라마 ‘용의 눈물’을 보게 된 것은, 역사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필자의 개인적 성향도 사유가 되겠지만, 호기심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방문하다 보니 여기까지 도달하게 됐다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를 VOD가 아닌, 실시간으로 시청하다가 정도전에 대해 좀 더 알고자 했다. 위키 백과 사이트의 내용과 검색 결과를 통해 정도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다. 그러다가 드라마 ‘정도전’을 보게 됐고, 이 드라마를 만들기 전에 제작진과 배우에게 강의를 했던 이덕일님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읽게 됐다. 그리고 최종 마무리로 선택한 것이 ‘용의 눈물’이었다. 평균 시청률 50%이란 기록을 세운 이 대작은, 이방원 역의 유동근 배우와 원경왕후 민씨 역의 최명길 배우의 몰입된 연기가 주목을 끄는 매력이었다. 여기에 하지원 배우와 송윤아 배우의 신인 시절 모습을 보게 된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조선의 건국은 왜 필요했을까?
조선에 있어서 태조 이성계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태종 이방원의 역할은 또 무엇이었을까?
  
고려 말은 왕조마다 보여 온 지배세력의 권력으로의 열망이 낳은 피폐의 시간이었다. 어떤 국가이든, 어떤 왕조든, 국가 지배세력이 권력을 쫓아 불나방처럼 방황하게 되면, 국가는 망가져 제 역할을 못하게 된다. 국가란, 대중이 집단을 형성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생겨나는 영토적, 정신적 집단 정체성이다. 따라서 대중이 모인 후 대표라는 역할이 만들어지므로, 국가의 중심은 대중인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가가 유지되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표들은 백성이 건강하게 하여 국가 유지 발전을 원활히 할 역할을 갖게 된다.
고려 말은, 이러한 대표들이 대표직 수행을 하면서 발생한 의사결정의 권한을, 대중이 부여한 것으로서 성실히 다루어야 함을 잊고, 권력이란 ‘탐(撢)’으로 인식하여,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이를 활용함으로써 백성을 ‘무조건 받침’의 대상으로 인식한, 또다시 반복된 시간이었다.
이 시절 백성들은 주로 농민이었고, 1년에 한 번, 가을에 쌀을 수확하여 국가에 세금을 내고 나머지로 생계를 삼았다. 태조 왕건 건국 시에는 20%만 내면 80%로 다음 소출이 있을 때까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고려 말이 되면, 세금과 권문세족과 귀족들의 수탈로 1년 소출 중 90%를 받치고 10%로 1년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가족이 몇 명이든 말이다.
  
이런 와중에 장수 이성계는 꿈을 꾼다. 무너지는 집에서 빠져나오면서, 그 집의 서까래 3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는 꿈이었다. 서까래는 기둥과 지붕 사이에서 가로로 얹어진 나무로 그 위에 지붕을 얹는다. 왜 3개였을까? 이 꿈을 무학 대사는 ‘등에 3개의 서까래를 짊어졌으니, 이는 왕(王)자이고, 곧 왕이 될 꿈’이라 해몽한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왜 3개인가? 집(국가)를 지탱하는 3개의 서까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너지는 집(국가)에서 가져 나올 만한 서까래란 무엇일까? 결과론적 해석이긴 해도, 국가를 지탱하는 3개의 서까래는 국가의 근본인 백성, 국가를 유지 발전시킬 새로운 지성인 신진사대부, 그리고 새로이 중원을 차지한 명에 대한 친명 정책이 아니었을까?
무너지는 고려에서 백성, 신진사대부, 그리고 친명외교를 지고 나온 이성계는, 백성들이 신뢰하는 정몽주, 국가적 지성인 정도전, 그리고 원나라를 축출한 명나라를 파트너로 하여 조선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세제가 개혁되어, 백성들은 쌀로 밥을 해 먹을 수 있게 되고, 이를 이성계가 준 밥, 즉 ‘이밥’이라 부르며 기뻐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이성계의 역할의 전부였다고 판단된다. 이성계 자신도, 정몽주만큼 백성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다. 항상 승리하는, 그래서 외적을 물리치는 든든한 장군이 이성계였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고 제안한 인물은 정도전이었으나, 개국 세력의 중심 기둥이자 대표는 이성계가 맡았다. 정도전이 자신의 구상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이성계가 가진 강력한 무력을 원동력이자 울타리로 삼은 것이다. 즉 이성계의 역할은 기둥, 대표, 원동력이었다. 지금도 대중의 신망을 받는 인물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이고, 실제 정치는 중심 세력이 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방법론적 전술이 장애를 만나게 된다. 서까래 3개 중 하나인 백성의 아이콘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당시 민심을 얻고 있어서, 고려를 버리고 조선으로 바꿀 때, 백성들의 전환을 도울 아이콘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국가 개혁에는 찬성하여 손을 잡지만, 역성혁명은 반대했다. 올바른 왕을 세우고 정치를 개혁하여도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믿고, 그가 정신적 지주로 있는 신진사대부를 모아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별도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이전에도 아버지를 도와 활발히 움직였지만, 이방원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성계에게 이방원은 서까래 3개에도 들지 않는, 단지 똑똑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정도전의 철학과 사상을 따르면서 혁명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혁명의 도가니 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방법론적 전술은 정도전의 전술에서 거의 채택되지 못 했다. 아니, 머리의 정도전과 힘의 이성계의 관계 속에서 이방원은 어느 한쪽의 전폭적 지지도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방원 마음속 역성혁명의 불길은 뜨겁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정몽주는 제거의 대상이었지, 설득할 대상은 아니었다. 물론 하여가를 통해 최후통첩을 하는 교양(?)은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코 이방원에게 반대파의 설득이란 방법론은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방원에 의한 정몽주의 척살. 이로 인해 이방원은 이성계의 눈 밖으로 확실히 밀려났다. 왜냐하면, 이성계가 짊어진 서가래 3개 중 백성을 날려버린 것이 이방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극단적 선택을 한 이방원을 국가 지성의 아이콘인 정도전이 인정할 리 없었다. 정몽주를 설득해 서가래 3개를 온전히 가져가려 한 이성계-정도전 듀엣의 활동에 이방원이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 있어서 이방원의 역할은 무엇일까? 오히려 역할이라기보다 이방원이 생각한 국가로 의문을 전환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정도전은 ‘자격이 없는 왕이 국가를 망친다’ 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여 그는, 지식과 경험을 가진 현자가 신진사대부로 대표되는 신권을 형성하여 나라를 이끌고, 왕은 현자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국가의 소유자로서 대표권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가를 주도하는 현자와, 현자의 활동에 하늘의 뜻이란 천명을 심어주는 왕 간의 권력 균형을 통해 국가를 올바로 이끌어가려 했다고 생각된다. 
  
현자는 과거를 통해 역량이 인정된 인재들과 함께 함으로써 현명한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이로써 독단으로 국가를 망칠 위험이 없다고 정도전은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세도정치를 통한 썩은 정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한 것 같다. 안정된 국가에게 정도전이 가진 초심의 열망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정도전은 간과했다. 법치를 통해 이를 방어할 수 있다 과소평가한 것은 아닐까?
  
이성계는 서까래 3개 중 지성과 친명 부분을 정도전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궁궐에 갇혀 지내 답답하긴 하여도, 정몽주가 없어 허전하긴 하여도 문제는 없다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이방원과 정도전 각각의 조선은 달랐다.
  
물론 이성계도, 왕의 역할 혹은 국가의 주인인 왕이라는 개념에 대해 정도전의 행보에서 의문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원과 이성계는 정도전에 대한 신뢰란 면에서 차이가 컸던 것 같다. 정도전의 사상을 지향하는 이방원과, 정도전에게 믿고 맡기는 이성계의 차이가 향후 시간들을 만든 것이 아닐까?
  
정도전은 신권 중심의 왕조를 만들기 위해 몇 가지 자극적 정책을 추진한다. 왕족은 정치에 나설 수 없다. 국가 내 사병을 철폐한다. 능동적 주도적 왕 중심이 아닌 신권 중심의 조선을 이어가고자 방석을 세자로 앉힌다. 방석이 성장하는 타임라인에 '교육'을 통해 원하는 왕으로 만들 수 있다 정도전은 믿은 것 같다.
  
이러한 자극적 행보는, 역성혁명을 통해 이씨 왕조가 세워졌고, 국가의 주인은 이씨이고, 이씨인 왕이 능동적 주도적으로 국가를 경영한다는 이방원의 생각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국가 지도층의 구조는 능동적 주도적 왕과, 이를 추종하는 신하로 구성되는 것이 맞는다는 이방원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즉, 국가의 전진은 왕이 이끌고, 왕의 생각을 구현하고 이를 받아 잘 관리하는 것이 신하의 역할이라 이방원은 국가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국가의 주도권을 왕에서 신하로 이전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정도전과 이방원의 충돌을 낳았다. 여기서 두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는 방법론적 차이가 나타난다. 정도전은 유교를 국가 철학으로 표방했지만, 어쩌면 법가의 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법이란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고 이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법치국가를 만들어 인간(왕)에 의한 오류를 막으려 했다. 따라서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는 방식은, 명분과 그 명분을 지원하는 법(제도)를 기반으로 한 제거였다.
  
정도전에 비해 세력이 약한 이방원이 선택한 것은, 정몽주 때와 마찬가지로 ‘칼’을 통한 물리적 제거였다. 과거를 통해 인증된 사람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제도적 명분으로 왕족의 정치 참여를 막았다.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기 위해, 사병을 국군으로 통합 편재한다는 명분으로 사병을 철폐하여 왕족의 물리적 힘을 제거했다. 또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 해결이란 명분으로 이방원을 명에 보내, 타인의 손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는 차도살인지계로 이방원을 제거하려 했다.
  
이러한 정도전의 행보에 대한 이방원의 응답은 이러했다. 세력이 없는 대신 인재를 모아 특공대를 구축해 최소한의 물리적 힘을 구축했다. 또한 명나라로 가서 오히려 차기 대권자에게 신뢰를 얻기도 했다. 이 시점부터, 세가 없던 이방원이 터닝포인트를 찍고 일어선다.
  
이방원은 정도전의 모든 것을 제거해 나갔다. 정도전이 세우려던 방석을 제거한다. 신권 주의 세력의 구심점 노릇을 하게 될 대표자 후보를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정도전의 핵심 인사들을 제거한다. 왕에게서 국가 주도권을 가져가려는 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또한 정도전도 칼로서 제거한다. 신권 주의 정치의 현자 역할을 할 정도전을 제거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 나가며, 이방원은 스스로 세운 사명 한 가지를 완수한다. 즉 국가 주도권을 신권에서 왕권으로 전환 시킨 것이다.
  
이방원의 역할 두 번째는 확보된 왕권을 어떻게 차기 왕에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객관적 기준으로 수립한 과거를 통해 인재를 모았고, 이방원은 자신이 그린 그림에 맞는 사람을 등용했다. 물론 과거를 통해 역량을 살펴본 것은 두 사람 모두 동일하다. 다만 역량 중심의 정도전과, 성향 중심의 이방원이 차이를 보였다.
  
신권 주의는 반대했지만, 정도전이 설계하고 수립해 온 국가의 소프트웨어는 되도록 그대로 전개해 나갔다. 물론 왕권 중심으로 소프트웨어를 제대로 변경했다면 무리가 없었겠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방원은 물리적 힘을 양위 후에도 유지했으니 말이다. 아니면 정도전과 같은 수준으로 왕권 중심의 소프트웨어 설계 및 전개를 할 수 없었던 지도 모른다. 태종 후대에 완성되는 경국대전은 신권 중심일까 왕권 중심일까? 태종-세조 등 왕권 강화를 기치로 내건 왕들의 혁명 반정 등이 있었으니 신권 중심이 되도록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소프트웨어의 뿌리가 되는 부분은 결국 실권이 신하에게 넘어가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왕의 의사결정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점 하나만이 확립된 것은 아닐까 한다. 조선왕조를 살펴본 결과론적 생각이지만, 왕이 주도적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면 자연히 신권이 중심이 되는 소프트웨어가 유지되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왕권 중심의 조선을 차기 왕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해서는 신하가 권력을 갖게 되는 일을 제거해야 했다. 즉, 외척이나 공신 혹은 왕의 신임을 받는 자가 그 신임을 기반으로 권력을 휘둘러 왕권이 위협받지 않도록 해야 했다. 따라서 왕의 추종 세력만을 남기고 가능성 있는 모든 이들을 칼로서 제거해 나갔다.
  
자신의 외척, 세종의 외척, 자신의 공신, 권문세족, 훈구 대신 등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거나 구축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모두 제거해 버렸다. 따라서 이방원은 ‘칼’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을 이씨의 나라로 만드는 역할을 고독하게 추진해 나갔다. 주위에 마음을 나눌 사람이 남아있질 않았으므로, 소통이 아니라 고독을 선택해 홀로 나아갔다. 아마도 고독의 베스트 프렌드, 외로움으로 치를 떨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방원의 진심은, 세종과 부딪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세종은 ‘Role-Playing’ 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능동적 주도적인 왕과 신뢰할 수 있는 역량의 신하가 합의와 조화를 통해, 설득을 통해 함께 나아가는 국가를 세종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드라마 이긴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에서 태종과 세종의 충돌 모습은 아마도 이러한 흐름을 형상화 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태종과 세종의 충돌은 방법적인 면에서의 충돌이라 생각된다. ‘칼’로 대표되는 물리적인 힘에 기반을 둘 것인가, ‘지(知)’로 대표되는 리더의 힘에 기반을 둘 것인가의 대립이라 생각된다.
대마도의 정벌로 왜구의 근본을 수술하고, 장영실 등의 발탁으로 소프트웨어적 국가 경영 접근을 한 수많은 치적들이 그의 손에 있는 ‘칼’의 그림자에 가려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끔찍하지만, 이방원은 눈물을 뿌리며 가장 빠르고 깔끔한 방법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세종의 ‘설득’이든, 이방원의 ‘칼’이든, 이성계의 ‘신뢰’든,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 장애는 제거되어야 한다. 설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여운이 남는다. 신뢰는 편중을 낳는다. 칼은 모두가 떠올리지만 기피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등장한 장애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경우에 따라 설득-신뢰-칼을 효과적으로 선택하여 최대한 문제가 없도록 제거해 나간다고 대답할 수 있다. 아마도 태조, 태종, 세종 모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대상에 대한 신뢰의 크기에 따라, 신뢰, 설득, 칼이 강조된 듯 하다.
  
이방원은 대상을 신뢰하지 못하여, 칼로 제거를 해 자신이 가진 그림을 구형하려 한, 철저히 고독을 선택한 군주였다 생각한다.

*이미지: Photo by Brandi Red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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