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마리는 내 등 뒤에 있다 에세이



이반 칼베락 / 미스터 앙리와의 조금 특별한 동거

일상의 순간마다, 우리는 충돌하고 갈등한다.
우리는 충돌과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온통 옳은 일들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코 물러날 수 없는 것이다. 배운 만큼, 아는 만큼, 준비한 만큼, 그리고 함께 협력하는 사람들과 합의 혹은 논의할 만큼 기세 등등하게 충돌과 갈등의 장에 나선다. 누구도 틀린 사람이 없는 세상.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선 善을 마음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결코 세상에서 갈등과 충돌이 없어질 수 없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온갖 근거와 이론과 논리가 뒤를 따른다. 때로는 감정도 실린다. 목소리는 더욱 높아진다. 상대의 선이 내 마음에서는 악이 된다. 대립한 덕분에, 상대는 적이 된다. 적은 나에게 해가 되니 물리쳐야 한다. 하므로, 온갖 전략과 전술이 동원되고, 더 빠르고 확실한 승리를 거둘 방법을 요구한다.

이 충돌과 갈등의 혼란의 도가니에 한 가닥 아름다운 봄바람이 부니, 그것은 다른 방법을 찾아 그 효과의 단맛을 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상대를 누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전략과 전술을 찾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마음과 의지를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방법을 가진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자신이 가진 생각과 방법과 목적지가 잘못된 곳이 없나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충돌과 갈등의 장에서 한 걸음 물러 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충돌과 갈등의 장에서 패배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잠시 회의를 멈추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다.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만지지 말라는 피아노로 '어!'스러운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마음에 원망이 가득하여 그 힘듬을 이길 길 없어 술을 마실 지도 모른다. 한 잔 술로는 부족해 한 잔을 더 마셨다. 한 잔 더, 그리고 한 잔 더. 답답한 마음은 풀릴 줄 모른다. 거듭된 알코올로 손과 발과 균형 감각은 풀렸지만, 아픈 마음의 통증은 깊어져만 간다. 알코올로 빨라진 혈류 속도에 더해, 그 혈류에 마음이, 낙숫물 아래 조약돌처럼 파여만 간다. 답답한 남편, 옹고집 남편. 결혼한 지 몇 년 간은 이겨낼 젊음이라도 있었지만, 이젠 이 말도 통하지 않는 노인네가 원망을 넘어 떨어지지 않는 신발 밑 껌딱지 같다. 답답한 마음에 맑은 공기라고 들이킬 요량으로 창으로 다가갔다. 오호통재라. 마음 대신 풀린 손과 발에 그만 열리는 문을 놓지 못하고, 집안의 공기와 함께 나도 날아가 버렸다. 그런 아내가 연주하던 피아노가 아마추어의 손에 소리를 낸다. 순간 ‘아! 나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라며 술도 풀지 못한 답답함이 아쉬움의 애잔함으로 바뀐다.

이런 우연한 기회는 밀려든 추억의 애잔함으로 생긴 보석 같은 기회다.
그런데, 20 페이지에 달하는 규칙을, 밥 먹고 물 마시듯 잊어버리고, 피아노에 손을 댄, 버릇없는 젊은 것의 연주에 그만 난 고집을 움켜진 손을 잠시 놓았다. 의도적인 은혜 배품도 아니었다. 단지 그것이 고마웠다. 아들을 유혹해주면 주면 6개월의 무료 거주 기회를 주겠다던 달콤한 유혹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젊은 만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 못된 계집애에게, 내 나이 반도 안 되는 그 말썽장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졌다.

아버지와 갈등하는 아내. 생기지 않는 아이. 그렇게 매일 답답한 마음을 가진 내 앞에 내가 좋다는, 젊은 아가씨가 나타났다.
나를 좋아한단다. 나와 같은 축구팀을 좋아한단다. 내가 축구팀에 열 받는 문제에 그녀도 답답해한다. 잠시 그녀를 쳐다봐도 되겠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다. 그러면 내 답답함을 잠시 잊을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까지!' 않다. 아~ 다시 답답해진다. 아내 대신 그녀에게 기대려던 마음이 다시 아내를 찾는다.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다. 그녀의 거절 덕분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우린 아이를 가질 계기를 만들지 못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내를 용서했다. 우리 아이를 너무 좋아하신다. 아버지와 갈등하던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게 됐다. 할아버지 집주인의 태도 변화로 명확해진 나의 길은 음악이다. 다시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무료로 거주할 집도 생겼다. 그동안 서로 반목하고 들리지 않든 상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해하게 된다. 고집도 갈등도 모두 가벼운 것이었다. 기다리던 손자와 피아노 연주를 해준 아가씨 덕분에 털어내면 없어질 먼지 같은 것이었다.

올바른 결론이었을까? 모두 행복해진 것인가? 사실, 이런 해피엔딩을 다시 판단하기 위한 기준을 찾을 필요는 없다.
며느리는 자신이 원한 대로 남편이 맡게 된, 시아버지가 물려준 회사를 팔았을 지는 중요하지 않다. 딸은 나만의 길을 찾았고, 다시 연주할 것이다. 아들이 기다리던 아이도 얻었고 집안의 갈등도 없어졌다. 아버지는 매일 방황하던 딸이 제 길을 찾고 나아가는 모습에 만족한다. 그럼 가계는 누구에게 물려주지?

우리는 갈등과 충돌을 만났을 때, 잠시 근처 카페에 혼자 가서 딴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평소 자주 듣던, 언제 들어도 좋은 음악을 틀고 창 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초점 없이 바라보는 것이 어떨까? 커피 맛도 음미해 보고, 손에 든 수첩에 이것저것을 긁적이기도 한다. 크게 숨도 쉬어 본다. 돌아가는 길에 내 상대에게 줄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상대가 말한 의견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렇게 나를 변화시키면 혹시 갈등과 충돌을 해결할 답이 아니라, 너도 옳고 나도 옳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양보의 꽃이 피어나지는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이번 갈등과 충돌을 넘는 슬기로운 방법이 되지 않을까?


Photo by Joshua Humphrey on Unsplash


덧글

댓글 입력 영역

최근 포토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