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은 존중이다. 뉴욕이라는 그릇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 한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지극한 관심에서 비롯되고 그에 기반해 성장한다. ‘關心’라 한자를 쓰는 관심은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 마음이다. ‘觀心’라는 한자는 쓰는 관심은 마음을 바르게 살펴보는 행위다. 전자는 사랑의 시작이 될 것이고, 후자는 사랑의 성장 기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무관심’은 마음이 끌리지 않는 상태이고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행위다. 즉, 사랑을 시작하지도 성장시키지도 않는다는 의미다.

무엇인가를 말 또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은 ‘공유(share)’이다. 내 안에 담아두고 있는 생각, 마음을 말 또는 행동으로 상대 앞에 꺼내놓는 행위다. 하지만 우리가 자주 듣는 요즘의 ‘공유’는 일정 기간 보유하는 행위를 포괄한다. 따라서 표현이 공유와는 동일하지 않다. 유사한 정도이다. 표현한 내용 외에는 내 안에 담겨 있다. 시기에 맞지 않아 표현하지 못한 경우도 있겠지만, 표현하길 거부하고 담아만 두기로 결정한 내용도 있다. 우리가 관심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시점은 담아 두려는 내용을 내가 표현하지 않았는데, 즉 꺼내 놓으려 할 마음이 없는데 남이 마음대로 들여다 보고, 언급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때이다. 더욱이 그 평가를 제삼자 앞에서 떠벌이듯 펼쳐놓을 때 충격을 극대화된다.

따라서 무관심은 존중이다. 나의 표현을 경청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關心(관심) 혹은 觀心(관심) 있는 사람의 태도다. 따라서 조심성 없는 관심에 하루에도 몇 번을 상처받던 나에게 뉴욕 New Yrok은 무관심이 가득한 그릇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뉴욕의 무관심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동안, 내가 존중의 무관심을 경험하는 동안 나는 한껏 자유로울 수 있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 Central Park에서는 돗자리를 깔고 엎드려 팔이 견디기 힘들 때까지 책을 읽는다. 서울의 올림픽 공원 잔디밭에서는 페이지를 거의 넘기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올림픽 공원에 갔을 때 대형 잔디밭의 분위기라든지, 기후라든지 독서에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뉴욕 센트럴 파크의 기억에만 의존하여 올림픽 공원의 잔디밭을 동일시했는지도 모른다. 뉴욕 유니온스퀘어 파크의 벤치는 벤티 Venti 잔의 커피를 놓고 독서를 했다. 서울의 벤치에는 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차이점은 불안감이다. 서울의 벤치는 나에게 편하지 않았다. 앉을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인근 카페에 들어가 앉아 커피와 함께 독서를 즐긴다. 뉴욕에서는 당연히 카페에서 독서를 즐겼다. 비록 카페 고객 회전율에 반하는 행위였지만, 야외 테이블에 앉아 원하는 만큼 독서를 했다.

혹시 뉴욕이 외국이어서,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마음을 놓고 공원에서 벤치에서 독서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뉴욕이 용가리 통뼈는 아니라는 말이다. 뉴욕이 특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해외여행 혹은 거주지에서 먼 국내 여행도 마음의 굴레를 벗게 한다. 타지로의 이동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뉴욕도 온양 온천이나 제주도와 다를 바 없다. 타지로의 여행이다. 그것이 3박 4일 동안이든 2개월 반 동안이든 기간이나 장소의 특성이 내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인간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맛보는 5가지 감각으로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한다. 수집된 데이터는 경험, 가치관, 사고방식 등의 필터를 통해 해석되어 뇌에 기억된다. 또한 기억된 내용은 꺼낼 때 다시 한번 변형되기도 한다. 그 일련의 입력-연산-출력의 과정에서 나는 뉴욕이 무관심이란 존중이 가득한 그릇이라 표현한다. 그들의 표현에서 그렇게 느꼈다. 국내에 있는 카테고리에 전시된 뉴욕의 물품이 더 다양하여 선택의 폭이 넓어져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국내에서는 뭐 저렇게 옷을 입고 다녀라고 튀는 옷차림에 ‘특이해’라는 시선을 던졌지만, 뉴욕의 사람들은 ‘개성 가득해’라는 시선을 받았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이럴 때 이런 옷차림, 저럴 때 저런 옷차림이라는 기본 매너 위에 평일에는 회사원들을 주말에는 일반 시민을 보았기 때문일까? 뉴욕은 11시에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중이나 주말이나 캐주얼 차림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황인, 백인, 흑인에 남미, 중동, 동양, 서구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오늘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세탁을 했다. 오늘은 남미인이 운영하는 가판대에서 베이글을 사 먹었다. 깔끔한 유니폼의, 우유 맛보다 커피 맛이 더 진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뉴욕의 벤티는 국내의 벤티보다 컸다. 세수할 정도 됐다. 2005년 해외 맥주를 마실 기회는 남대문 미제 아줌마에게 가거나 백화점에 가서야 구할 수 있었는데, 뉴욕에는 보스턴 라거도, 하이네켄도, 버드와이저도 있었다. 코리아 타운에서 신라면을 살 때 더 이국적인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내 마음의 굴레가 제주도에서보다 더 빠르게 흔적 없이 벗겨져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동성연애를 인정해 달라는 퍼레이드가 에버랜드 야간 퍼레이드처럼 취급받는다. 옷의 면적과 동일한 수준의 문신이 피부를 가리고 있다. 귀 말고도 코, 입술에도 걸이가 달려 있다. 독립 기념일 축제에 지정된 위치가 아니라 불꽃축제가 가장 잘 보이는 항구 계단에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 앉아 사진을 찍고 터지는 불꽃에 함성을 지른다. 토요일 오전 숙소 아래 카페에 앉아 에어컨과 아이스 라테를 즐기며 독서를 하고 있는데, 옆 좌석에서 ‘나도 그 책 재미있게 읽었어’라며 보내는 미소가 자연스럽다. 간직한 부분에 뚫고 들어오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의 접근을 나는 무관심으로 본 모양이다. 다양성을 마음껏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표현하는 그들의 행동이 무관심으로 판단된 모양이다. 그래서 무관심을 존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나 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지나친 침입은 매너 없음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말없는 다수가 많다 보니 신나게 떠 뜬다. 말없는 다수가 신나게 떠는 내용에 낄낄거린다. 조롱이 개그가 된다. 조롱이 재미있는 대화가 된다. 남이 조롱받고 있는데 이를 예능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관심을 존중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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