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에세이




제임스 설터의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지난 주 구립 공공도서관에서 대여했다. 그리고 오늘, 수요일에 처음으로 책을 펴고 읽어 봤다. 서문을 읽고 난 후 첫 글을 읽고 표지를 덮었다. 그리고 ‘금주 반납할 서적’으로 정리했다. 그 전에 ‘금주에 꼭 읽을 책’으로 분류한 이문열 옮김 ‘수호지 1’은 계속 읽다가 중단했다. 그 전에 읽던 책을 잠시 놓고 쉬는 중에 분류를 하려고 편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 읽던 책을 다 읽고 읽을 생각이다.


첫 글을 읽고 ‘금주에 반납할 서적’으로 정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뭐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이제 할 이야기를 시작하자.


‘제임스 설터‘와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이 두 구문 중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에 눈이 꽂혔다. 



메모 하지 않아서 다시는 생각나지 않아 ‘아~~~’ 하던 기억 때문일까?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상기되지 않는 이유는 내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정리했다. 마지막 말은 스스로 내린 변명이라고 해도 대꾸할 생각은 없다. 언제나 정리는 중요하니까. 그래야 앞으로 발을 낼 때 발목을 잡는 아쉬움이 없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떻게 정리’가 아니라 ‘언제나 정리’이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은 존재한다. 사실 썼지만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들도 존재한다. 어딘가에 쓰고 ‘잘 보관해 두어서’ 찾지 못하거나 보관한 일 자체를 잊거나. 써도 사라지므로 쓰지 않으면 당연히 사라진다. 


종이에 쓰는 것을 이 책은 이야기하지만, 기억력 좋은 사람은 ‘종이’라는 매체를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종이’에 쓰든 ‘머리’에 쓰든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런데, 사라지면 어떤가? 사라짐의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댄 애리얼리의 ‘최고의 선택’은 인간 세상을 ‘시장성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과 ‘사회성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나눈다. 물론 전 가구의 50%를 넘은 1인 가구에는 ‘고독이 지배하는 세상’도 존재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시장성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과 사회성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이 구분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칙에 따라 ‘최고의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세상이다 보니 누군가가 쓰지 않아 사라진 내용에 영향을 받는 대상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 싶다. 


쓰지 않아 사라지게 한 주체가 명망 높고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그럴 것 같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영향 받을 수 있다. 어떤 주제는 확실한 기준이 있어서 영향을 덜 받지만, 어떤 주제는 확실한 기준이 없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고 당연히 어딘가로 부터 영향을 받는다. 게다가, 세상은 인과법칙이 지배하므로 무엇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 아무도 모르고 예측도 잘 맞지 않지만, ‘쓰지 않아 사라짐‘이 원인이 될 경우 그에 따른 결과도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에 꽂혔을 때 얼른 연이어 생각난 것을 써보자 싶었다. 자! 이제 처음부터 여기까지 다시 읽어 보자.


- -


다시 읽어 보았다. 뭔 소린지 모르겠다. 마치 뇌가 머리에 있지 않고 지금은 10개로 나뉘어 손가락 끝에 있고, 그 손가락 끝이 스스로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는 감각이다.


만일 내가 이 글을 쓰지 않으면, 그래서 잊히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만일 내가 이 글을 쓰고 어딘가에 게재를 하면, 어떤 결과를 낳을까? 전자의 ‘어떤 결과를 낳을까?’는 궁금함의 억양이고, 후자의 ‘어떤 결과를 낳을까?’는 부정적 시니컬 억양이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의 서두는 어떤 분이 돌아가셨고, 그 분은 글을 쓰는 분이었고, 지금까지 메모, 초안 등을 모아둔 박스들이 치워도 치워도 계속 나온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 하늘로 가신 분은 저자에게 ‘모아두지 말라’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렇게 바리바리 모아두었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1) 기억하기 위해 2) 잊지 않기 위해 3) 어떤 시작의 단초를 잃지 않기 위해 그렇게 남겨둘 것이다. 내 발치에, 그러니까 내 작업대 아래 메모한 종이와 노트가 잔뜩 있다. 다행히, 이글의 분위기에서는 ‘다행히’ 나는 가끔 그것들을 들춰본다.


당황스러운 때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글을 쓴 사람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휘갈겨진 메모를 만날 때다. 이 경우는 쓰지 않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썼는데 못 알아봐서 사라지는 경우이겠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짐은 존재한다. 그렇게 온 마음으로 좋아했는데 지금은 곁에 없는 예전에 그대. 그것을 휘갈겨서라도 메모한 이유는 그 대상에 집중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 집중의 수준이 그 때의 좋아함의 수준만큼 인지는 모르지만. 좋아하고 곁에 있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대. 좋아하는 수준이 언제보다 높으니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을 텐데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점. 썼는데 못 알아보는 것과 눈앞에 있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의 공통점.


위 문단을 쓰면서 굉장히 큰 쓸쓸함을 감각한다. 대중 속의 고독. 한 때 이 말이 귀에 울려 계속 지속적으로 머릿속에 넣어 다닐 때가 있었다. 그 대중이 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없는 곳에 있는 것과 같을 텐데. 아마도 ‘대중 속의 고독’의 ‘대중’은 아는 사람인가 보다. 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인데 그들도 나에게 접촉을 하지 않고 나도 그들에게 접촉하지 않는다. 마음은 접촉하고 싶은 모양이다. ‘고독’을 감각하는 걸보니.


적어 두었고, 지금도 알아볼 수 있는데, 그 이상이 되지 않는 메모, 기록, 기억. 쓸 때는 필요했을 텐데. 나중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일단 ‘기록, 기록!’ 했을 텐데. 내 판단이 잘못 된 것인지, 내가 활용 처를 모르는 것인지.


벌써 한글로 3 페이지 째 쓰고 있는데 나는 ‘‘쓰지 않음’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손에 기록할 매체를 가지고 다닐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을까, 아니면 ’‘사라지는 것’이 너무 아쉬우니 사라지지 않도록 어떤 수단이라도 강구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릴까?


통 크게 ‘갈 놈은 가고, 남을 놈은 남겠지’하고 내 발목을 붙잡는 이 생각을 털어낼까? 그게 더 쿨(cool)한 결론이 아닐까? 별 쓸데없는 것으로 고민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이러고 있다.


메모할 때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나이가 먹을수록 식별력이 상승하고 싶다. 이것이 나중에 활용할 운명으로 분류하든, 활용하리라고 의지를 세우든 남길 만한 것을 남기고 싶다. 적어도 메모 여부를 생각할 때는 혼자의 세상일 테니 쓰지 않아 사라진다 해도 영향 받을 대상을 없을 테니까.


#메모 #기록 #기억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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