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평범함에 불만을 품게 된 이유 유익 흥미로운 한글 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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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년 전 대학 강사로 19세기 미국 문학을 강의했다. 학생들은 대부분 몇 페이지 만에 "Moby-Dick"이나 Ralph Waldo Emerson의 “Essays”를 포기했고, 나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 눈에 띄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한 학생은 달랐다.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고, 그의 태도에 학우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학기 말, 대부분의 학생이 효율적이며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에세이를 제출한 것과 달리, 그 학생은 마감 이틀 전에 제출일을 연장해 달라고 구걸했다. 진단서 없이는 연장이 불가하다고 설명했고, 마감에 늦으면 학점이 깎일 것이라고 전했다. 그 학생은 이미 과제 작성을 완료했다고 말했다. 왜 제출하지 않냐고 되물으니 "끔찍해서"라고 답했다. 결국, 하루 늦게 그 과제는 제출됐고, 5점 감점됐다. 하지만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 학생은 학부 내내 과제 제출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정상에 이르렀다. 다음 해 필자가 운영하는 석사 프로그램에 등록한 그 학생은, 눈부시게 빛나는 과제를 마감을 넘겨 제출했다. 최종 논문 마감 일주일 전, 그 학생의 이마에 발진이 난 것을 발견한 필자는 그의 건강에 관해 물었다. "괜찮아요. 스트레스받을 때 이마를 문질러서 그래요." 그의 손톱이 이빨로 바싹 물어뜯은 것과 그의 손가락에 적색 패드가 둘둘 감겨있었다. 


코를 높이고 가슴 사이즈를 키우는 것은, 원하지만 달성할 수 없는 완벽한 미래에 관한 바람을 나타낸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만난 그 학생은 멍하니 혼이 빠진 것 같았다. 논문을 제때 완성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에게 그건 학위 논문이지 필생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했다. 완벽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사본도 남겨두지 않고 논문에서 20,000 단어 이상을 지웠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런 내용을 내가 존경하는 당신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것이 필자가 그 학생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는 마지막 제출 기한이 완료됐을 때, 논문도 변명도 제출하지 않았다. 필자는 그에게 작성한 내용을 보여달라고 말했고, 그는 나에게 "당신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필자가 그 학생을 가르친 학부 강의 계획서에는 Nathaniel Hawthorne이 1843년에 쓴 단편 소설 'The Birth-Mark'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완벽주의에 관한 심리학 연구 중 가장 소름 끼치는 연구였다. 


젊은 과학자 Aylmer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 Georgiana의 뺨에 난 작은 붉은 반점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에게 그 반점은 "인간의 치명적 결함… 죄, 슬픔, 부패, 죽음에 대한 아내의 책임의 상질"이었다. Georgiana 역시 "자연이 불완전하게 남긴 것"을 교정하기 위해 그의 연구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남편의 연구 노트를 보게 되고, 그가 목표로 한 이상과 비교했을 때 그가 이룬 찬란한 성공마저도 실패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자신의 '치명적 결점'에 대한 남편의 병적 집착은 남편이 가진, 자신에 대한 환멸을 나타냄을 알게 된다. 결국, 반점은 사라졌지만, Georgiana 역시 사라졌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이후 전 세계 남성 및 여성의 진정한 열망이 됐다. Hawthorne의 소설을 읽고, 터키나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성형수술 후 사람들이 죽거나 불구가 됐다는 소식에 관심을 두지 않기 어렵다.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완벽주의를 무력화하는 바로 그 환경에 적응했다.


코를 높이거나 가슴 크기를 변경하는 것은, 원하지만 성취할 수 없는 완벽한 미래에 대한 바람을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 소비주의자의 삶에 재앙을 내리는 완벽주의자의 환상 중 하나일 뿐이다. 광고판, TV, 소셜 미디어에 비친 완벽한 결혼식과 집과 휴가지는 수십억 시청자들에게 질투와 빈곤감 그리고 갈망을 조장한다.


필자는 정신분석가로 일하면서, 직업, 낭만, 육체, 혹은 도덕에서 완벽이라는 가혹한 이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닿지 못하는 것에 한탄하거나 스스로 질책하지 않고 지나가는 하루가 드물었다. 자기 괴롭힘(self-laceration)은 동료, 형제자매 혹은 친구 같은 다른 누군가가 성공을 위해 필요한 노력이나 간교한 속임수(guile)를 동원했다는 믿음에 의해 증폭되기 쉽다.


지난봄 자가 격리가 시작되면서, 필자는 많은 환자가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재택근무에 적응하면서, 업무량 감소, 지속적 감시로부터의 해방, 우선순위 재조정의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빵 굽기, 걷기, 읽기 등 단순한 즐거움을 받아들였고, 파트너 및 가족과의 관계를 낙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종교적 관점에서, 인간의 완벽이란 신성모독이다.


필자는 특히 이런 변화와 동행하는 자아수용(self-acceptance) 현상에 특히 놀랐다. 한 환자는 "정책 검토를 제출하는 것에서 약간 고소한 기분을 느꼈다. 그 내용이 꽤 엉망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병리학적으로 양심적(pathologically conscientious)"이라고 소개했지만, 지금은 "간신히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드는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수년간 보상도 못 받고 받친 수천 시간의 초과 근무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자가 격리로 그녀는 정원 가꾸기, 가족과 자전거 타기, 아이들과의 보드게임 등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에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약 6주 후, 그녀에게 이런 면죄부적 분위기가 시들고 예전의 완벽주의 요구가 징벌처럼(punitively)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바이러스처럼, 완벽주의를 무력화하는 환경에 적응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느슨해졌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재택근무에서의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을 찾았다. 즉, 이런 사회적 압력(자가 격리 등)에서 누가 더 생산적일 수 있을까에 주목한 것이다.


더 엄격해진 피트니스 식이요법,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자녀 교육 등 많은 환자에게서 이러한 변화의 일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반려자와 동료 등에게 점점 더 짜증을 냈고 좌절감을 느꼈다. 한 남자가 나에게 "때때로 자기 성찰이 실제 행동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때때로 뒹굴뒹굴하기를 그만하고 그냥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의 둔화한 생활은 일시적 휴식이고 다시 진지해질 때라고 생각하는 느낌이었다. 완벽주의가 예전처럼 매혹적이자 용서할 수 없는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완벽주의 열정의 보류에 이어 끝날 줄 모르고 되돌아오는 환자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완벽주의가 뿌리 깊고 끈질긴 인간 조건의 요소가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어쨌든, 성경은 신이 창조한 인류가 은혜에서 죄와 필멸로 하락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인간의 기원은 여러 문화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는, 적어도 일신교의 법전에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완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책략(extravagant scheme)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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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종교는 이와 대비되는, 아마도 보완적인 목적도 가진다. 수 세기 동안 종교는 타락하고 결함 있는, 다시 말해서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주요 수단이었다. 도덕적, 영적 개선을 위한 종교적 노력은 완전함은 오직 신에게만 있다는 침울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바벨탑을 건축한 사람들, 프로메테우스 같은, 성서나 신화 속 일반인들이 신의 지위를 찬탈하려 시도할 때면 때에 맞춰 처벌을 받는다. 종교적 상상력에서, 인간의 완전함이란 개념은 신성모독이다.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 종교와의 유대는 느슨해졌다. 니체는, 신을 죽인, 세속적 근대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신 없이 살 수 없음을 목격했다. 그 사람들은 신 대신 문화, 과학, 상업, 국가, 자아 같은 새로운 신을 발명했다.


1841년 Emerson의 "독립독행(self-reliance)"이라는 자극적 방어부터, 1930년대 자조 산업(self-help industry)의 부상과 셀피 문화(selfie culture)에 이르기까지, 자기 본위(selfhood)는 우리의 최고 가치이자 우리 노력의 대상으로 간주됐다. 교육적, 미학적, 재정적 개선과 타인 확인에 대한 니즈(need)는 우리 모두가 현재 숨 쉬고 있는 완벽주의를 형성하는 요소다.


완벽주의는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얄팍한 삶을 향한다.


피할 수 없는 완벽주의로의 행보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만연해 있다. 2017년 한 기사에서 두 명의 영국 심리학자 Thomas Curran과 Andrew Hill은, 젊은 세대의 완벽주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원인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점점 더 불안해하고 통제하려는 부모의 행태"도 비판했다.


특히 매력적인 전문직 및 창의 활동을 하는 직업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값이 오른 주택 공급으로 과밀해진 노동 시장은 젊은이들과 그 부모들이 경쟁 우위 확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로 인해 무급 인턴십, 추가적인 교육 훈련, 혹은 부업(side-hustle)을 시작하게 했다.


완벽주의적 불안의 확산과, 자유시장이 야기하는 불안정 및 경쟁 분위기를 연결함으로써 이 심리학자들은 미국 철학자 Michael Sandel이 능력주의(meritocracy)를 비판할 것이라 예상했다. 2020년 출간된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에서 Sandel은, 능력주의적 자본주의가 사회 내 영구적 경쟁 상태를 만들고 연대와 공동선(common good)'의 개념을 부식시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승자와 패자의 질서를 유지, 영구적 경쟁 상태로 인해 '자만과 자기 경하(hubris and self-congratulation)'가 발생되고 연대 및 공동선 부식으로 인해 만성적인 자기 가치 비하가 발생된다.


이러한 문화에서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점점 더 불만족스러워지기 쉽다. 소셜 미디어는 완벽한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만들어 우리가 느끼는 부족함의 크기를 증폭시킨다. 


내재된 가치감(intrinsic feelings of worth)이 없을 때,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가치를 외부 측정과 비교해 살펴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학업 기록, 운동 능력, 인기, 직업적 성취 등이다. 기대에 못 미치면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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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사회적 기대치에 대한 중압감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 차츰 쇠진해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기대(expectations)가 너무 다채롭고 모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대 완벽주의는 대중문화의 규범에 뿌리를 두었고, 이제는 풍자적으로 보이는 이상적인 백인 미국 가족이라는 유명한 광고 이미지에 포획됐었다. 


그 시대의 완벽주의란, 남자에게는 조각된 자신감, 여자에게는 겸손한 자애로움이라는, 가치, 행동, 외모를 이음새 없이 따르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완벽주의자는 타인보다 더 이 기준에 맞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완벽주의자는 관심 경제에서 발판을 마련하려 할 경우 독특한 스타일과 재치를 통해 돋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완벽주의를 해로운 힘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다. 완벽에 대한 요구는 목을 죌 수 있지만,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성취가 자신을 일관되게 하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삶에 압도되어 자신의 부족함을 책망할 때, 뛰어난 성적이나 수천 개의 인스타그램 좋아요 개수는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있다는 덧없는 감각을 전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감각은 빠르게 사라지고 지속적인 채움을 필요로 한다. 정신 분석자 Moya Sarnen은 "완벽주의는 존재하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얄팍한 삶을 향한다. 만일 당신이 영원히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진 삶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1990년 미국 심리학자 Randy Frost는 완벽주의 측정용 35개 질문을 개발했다. 이 '다차원 완벽주의 척도(multidimensional perfectionism scale)'에 따르면 완벽주의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유형은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self-oriented perfectionism)로, 더 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기 박해적 불평(persecuting refrain)이다. 이런 유형은 동기를 부여하지만, 이상적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발생시킨다. 즉,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며(fitter), 더 부유해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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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상담실에서 발견한 바로는, 아몬드 크로와상을 먹는다고 자책하거나, 프레젠테이션에 애쓰는 대신 경찰 드라마를 빈지 워칭(binge-watching; 단시간에 여러 개의 TV 프로그램 에피소드를 관람하는 행위) 하거나, 혹은 한 아이의 역사 에세이를 점검(checking over a child's history essay)한다.


두 번째 유형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완벽주의(socially prescribed perfectionism)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경우다. 내적 독백이 우리가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말해주기 때문에, 이 유형은 종종 비평의 환상(fantasies of criticism)으로 표현된다. 품위 있는 매너가 불충분하다든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옷, 혹은 재미없는 대화(dull conversation)에 관한 헐뜯는 말(독백; snide deprecation)을 듣게 된다.


세 번째 유형은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로, 우리가 우리 주위 사람들도 우리가 가진 불가능한 이상에 부응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박해하는 듯은 목소리를 밖으로 낸다. 이 완벽주의를 권력의 도구로 휘두를 때 이 유형은 가장 유해하다(noxious). 예를 들면, 자녀에게 A가 단지 9개뿐인 이유를 묻는 부모, 혹은 피고용인이 독감을 이겨낼 수 없는 이유를 보지 못하는 보스가 그렇다.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는 거의 언제나 투영의 형태로 존재한다. 권위적 비판이라는 어설픈 겉모습을 하고, 우리가 스스로에게서 발견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실패와 실망을 타인에게서 찾는다. 


완벽주의는 상이한 성격 유형 및 상이한 취약성에 적응하는 카멜레온적 속성을 지닌다.


이 세 가지 유형은 흥미로운 개념이지만, 실제 그러한 모습의 사람들과 맞닥뜨렸을 때 즉시 유형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더 날씬해야 한다거나 더 똑똑해져야 한다는 요구(imperative)는 내적 그리고 외적 목소리의 합창을 양분으로 삼는다. 자기비판의 감정이 어떻게 타인에 대한 비판으로 전달될 수 있는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완벽주의는 약삭빠르다(slippery). 임상적으로 보면, 완벽주의는 아찔할 정도로 다양한 증상에 나타난다. 우울증과 불안, 강박 장애, 비판 혹은 모욕에 민감한 사람들의 나르시시즘(허세( grandiosity)를 투영해 극심한 연약함을 감출 때 나타난다), 심리적 질환(psychosomatic illness), 자살 충동(suicidal thoughts), 신체 이형증(body dysmorphia) 및 섭식 장애에서 나타난다. 완벽주의는 상이한 성격 유형 및 상이한 취약성에 적응하는 카멜레온적 속성을 지닌다. 이는 아마도 완벽주의가 별개의 정신 장애(discrete mental disorder)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일 수 있다.


이는 완벽주의가 매우 남다른 어린 시절의 경험이라는 토양에서 성장할 수 있음도 나타낸다. Curran과 Hill은 "헬리콥터 부모(helicopter parents; 자녀의 학업 및 과외 활동을 억압적으로 감독하는 부모들)"가 완벽주의를 증가시키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나의 경험에 따르면, 이와는 크게 다른 양육 스타일이 유사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자녀의 삶과 거리를 두는 불간섭주의 부모는 일종의 인정(recognition)에 대한 깊은 갈망을 자녀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 이런 부모는 결코 완료되지 않은 성과의 축적만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승리할 수 없다고 느끼는 아이, 럭비, 체스, 혹은 치어리딩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부모의 계속되는 비판을 야기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더 잘하기 위한 영구적 갈망(permanent itch)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하릴없이 한 낙서나 빛나는 달성이 모두 획기적 성취라고 자녀에게 확언하는 부모를 가진 아동도, 자신의 초년도 성취를 지속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될 수 있다. 어떤 경로를 선택하든, 이러한 육아는 부모로 하여금 자녀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행동을 부추기게 되어, 평생 자녀에 대한 염원(aspiration)과 자신의 욕망(desires)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계속하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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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많은 사람이 정신분석의 본질로 간주하는, 부모를 탓하는 공식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올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도주의적으로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하는 행동이 지나친 관여인지 아니면 덜 관여하는 것인지를 구별하는 지점을 찾기는 미칠 정도로 어렵다.


완벽주의의 덫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의 정신 구조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이상을 마음에 새긴다.


정신분석가들은 이를 자아 이상(the ego ideal), 완전한 자아의 이미지라고 한다. 우리는 유아(infants) 시기에 부모 혹은 양육자의 흠모의 시선(the adoring gaze)으로 자아 이상 혹은 완전한 자아 이미지가 다시 우리에게 비치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 우리는 또한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부모의 내면화된 목소리, 슈퍼 자아를 획득한다. 이는 전형적으로 시간이 흐른 후 교사 혹은 보스 같은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다른 성인에 의해 증폭된다. 하지만 우리 정신에 서식하는 두 가지 페르소나 모두 힐문 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완벽주의는 자기애(self-love)와 자기비하(self-abasement)로부터 성장한다.


일부 심리학자를 완벽주의를 병적인 모습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1978년 미국 심리학자 D.E. Hamachek은 정상적 완벽주의와 신경증적 완벽주의를 구분해 냈다. 정상적 완벽주의자는 징벌적 자기비판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높은 기준을 세울 수 있다. 그들은 개선의 노력을 하는 자신을 기쁘게 바라볼 수 있다.


이후 연구자들은 완벽하려는 욕망이 '정상적'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Hamachek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은 좌절과 부적절함이라는 감정만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자와 함께 일하면서 필자는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완벽주의가 우리의 자존감을 부식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발전하고 성장하려는 야망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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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가 열망에 침입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쉬운 방법은 없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해냈다거나 충분하다고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예외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즉, 우리가 우리 부모님이 만들어 놓은 무대에 오른 완벽한 존재가 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프랑스 심리학자 Serge Leclaire는 삶이 우리를, 이렇게 멋진 아이를 은유적으로 죽이는 과제를 준다는, 흥미로운 생각을 상정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상적 자아에 대한 환상을 단념하고 그것의 불가능성에 슬퍼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어머니를 불치병으로 잃은 20대 여성인, 필자의 첫 환자를 생각나게 한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걸음마를 배울 때 이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재혼한 가족과 함께 해외에 나가 살았다. Lydia는 자신의 이미지에 괴로워하며, 강박적으로 셀카를 올리고 좋아요 개수를 추적했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피부, 치아, 체형을 법의학적으로 검사하면서 결함이 있는지 확인했다.


어떤 길로 가든, 자녀가 기쁘게 하고 싶다는 절박한 욕구를 부추길 수 있다.


그녀가 성장하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성공적인 사업 경력을 쌓기 위해 전념하며, 자녀 양육은 계속해서 오페어(au pair; 외국 가정에 입주해서 아이 돌보기 등 집안일을 하고 약간의 보수를 받으며 언어를 배우는, 보통 젊은 여성)에게 맡겼다. Lydia는 학업, 친구 관계, 소년등과의 일상적 투쟁에 어머니의 관심을 끌어올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관심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화장, 매니큐어, 온라인 쇼핑 등 패션과 몸단장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마스카라를 바르거나 머리를 빗을 때, 어머니가 사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언젠가 그녀가 남자를 만났을 때 얼마나 운이 좋은지 이야기했던 것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선생님이나 친구에 대한 문제를 그녀에게 이야기하려 노력할 것이고, 말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서 흥미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 것처럼." Lydia는 굳건히 자립하게 됨으로써 이 문제에 대처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육체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필자는 Lydia에게 그녀가 화장에 집중할 때 어머니의 시선에 비친 사랑스러운 아이로 변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필자의 이 말이 오랫동안 억눌린 분노와 좌절을 촉발케 했다. 그녀는 씁쓸하게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내가 소리를 질렀다면, 그제야 어머니는 나를 인식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내 말을 결코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격렬한 분노는 지연된 비탄의 한 형태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어머니의 관심을 끌었을 때 순식간에 그녀가 이루었다고 느낀 완벽한 아이에 대한 비탄이었다. 그 완벽한 아이를 애도함으로써 Lydia는 강박적 자기 성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셀카를 중단하고 얼마 후, Lydia는 웃는 얼굴로 필자를 찾아왔다. 그녀는 "세션에 참석하기 위해 나가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오, 내가 꽤 매력적인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라며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하지만 우스운 말이지만, 나는 슈퍼모델이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슈퍼모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Photo by Dimitar Stevcev on Unsplash


완벽주의는 우리가 성공을 위해 박차를 가하는 행위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유치한 태도다. 완벽주의는 우리 자신이 최고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면 우리의 삶이 사실상 끝난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Lydia가 그랬던 것처럼, 완벽주의의 손을 놓는 순간이 비로소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완벽주의 #삶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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